(배경) 아랍,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지,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요. 이 분쟁은 고대 중동에서 탄생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간의 갈등이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은 레반트 지역 서쪽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작지만 강한 나라입니다.
레반트(Levant)는 중동의 팔레스타인(가나안)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이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탈무드와 유대교 그리고 중동 전쟁의 신화로 잘 알려진 나라로 3만 km²의 작은 땅에 9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70년대까지는 텔아비브가 임시수도였고 80년대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는데요.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개 종교의 성지로 온전히 유대인들만의 소유가 아니라서 지금까지 큰 논란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최근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해주면서 아랍국가들과 무슬림들의 반발을 사고 있죠.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는 종교 문제가 결합되어 복잡한데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이들은 모두 중동에서 생겨난 유일신을 믿는, 뿌리가 같은 종교입니다. 이 세 개의 종교가 모두 같은 신을 믿고 있지만 종교와 종파에 따라 해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있습니다.
유대교가 가장 먼저 생겨나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또 나중에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고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또다시 수백 년이 지난 후, 선지자였던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천국을 여행한 후 이슬람교가 탄생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는 도시로 어느 종교만의 소유가 아니라서 이와 관련한 수많은 논란과 갈등이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 단일민족 국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요.
유대인은 모계 혈통이거나 유대교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인구의 75%가 유대인이고요. 나머지는 아랍계 아프리카계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를 거치고 시온주의가 19세기 말부터 유행한 이후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현재 이스라엘로 이주해 오게 되었는데요. 이들은 대부분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와 러시아와 유럽에서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구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많은데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이 한 곳에 모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은 백인계 유대인이 상층을 형성하고 아랍계 유대인들이 하층을 구성하면서 양극화와 함께 사회적 갈등이 매우 빈번하다고 합니다.
갈등 상황에서 유대교는 '우리는 하나'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특히 이스라엘 건국 초기는 사방에는 적들이 득실거리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빠른 통합을 위해서도 유대교는 매우 중요했죠. 아무튼 이런 내부 갈등을 극복하면서 현재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터를 잡았고 80년대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문명과 오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죠.
문제적 지역인 팔레스타인은 요단강 서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곳으로 기원전 3천 년 경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문명의 요람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세계적인 종교들이 탄생한 거죠.
특히 이곳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선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요.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집트(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팔레스타인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이곳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다시 이곳의 주인이 되었죠. 그리고 다윗 왕 시절부터 그의 아들인 솔로몬 왕의 통치기까지 팔레스타인의 패권을 차지하고 그들은 유대인 왕국을 건설한 뒤에 예루살렘에 유대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성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제일 중요한 도시로 인정받고 있죠.
하지만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 이스라엘은 분열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 시기에 유대인들의 나라는 두 나라로 쪼개졌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또 얼마가지 않아,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의 땅을 차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중동을 통일한 페르시아 제국에 봉사하다가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알렉산더 제국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는데요.
이때 로마군에 의해서 유대교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아 오랫동안 살던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를 유랑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디아스포라(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라고 불리는 사건이죠.
이후 유대인들은 2천 년 동안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야만 했고 각종 차별을 받았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현지에 동화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었죠.
그리고 디아스포라 이후, 유대인들이 쫓겨난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라비아에서 탄생한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슬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서 알라의 도움으로 밤하늘 천국을 여행한 이후 이곳에 이슬람교의 성전을 세웠기 때문이었는데요.
아무튼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메카-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들은 대대로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슬림들은 지금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죠.
이렇게 유대인들이 세계를 유랑하는 오랜 시간 동안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의 땅이었고 그들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이 몰려와 예루살렘을 한 동안 정복했는데요.
로마 교황은 이교도들이 예수가 부활한 성지인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고 십자군을 조직해 원정을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슬람 성지를 회복한 후부터는 약 700년간 예루살렘은 다시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펴본 팔레스타인과 유대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은 유대교가 약 1000 년, 기독교가 약 400년, 이슬람교가 약 1300년을 각각 지배했던 곳인데요.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중요한 성지로 발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까지 3대 종교 신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예루살렘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갈등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유럽과 세계를 유랑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여러 나라에서 현지에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19세기 말 세계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반유대주의로 고통받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드디어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장하고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었죠.
그리고 이때쯤부터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입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더 확산시키는 사건이 터지는데 그게 바로 1차 대전입니다.
1차 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삼국 동맹에 가입한 오스만과 중동에서 싸우고 있었거든요.
이 당시 팔레스타인은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과거 오스만이 지배했던 영토들이 승전국들의 차지가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오스만을 물리치는데 영국에 협력한 아랍의 하심가는 요르단 강 동부의 요르단 국왕이 되면서 나중에 독립하게 됩니다.
요르단강 서구에 남겨진 팔레스타인은 영국 위임통치 지역이 되는데 유대인들은 이때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한 레바논, 시리아는 프랑스 관할이 되었죠.
이 과정을 보면 중동의 경계는 아랍 현지인들의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이해득실을 따라 정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렇게 강대국들에 의해서 강제로 정해진 경계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동 문제에 근원입니다.
어쨌든 이런 역사적 과정의 결과 영국 관할하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왔는데요.
그래서 아랍의 팔레스타인 토착민들과 유대인들이 섞여서 살게 되었고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은 많은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벌어진 세계 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서방 국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의 고향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주해 온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쟁이 계속되자 유엔은 결국 194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국가 두 개로 분할하는 방안을 승인하게 되는데요.
이후 중동은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아랍국가들의 중동 전쟁의 역사가 시작합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1948년에 현대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유대 국가 건설이 되자마자 유대인들은 아랍 국가들과 70년대까지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동 전쟁입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19세기 말부터 이주하기 시작했는데요.
서방 국가들은 유대인 이주를 오래전부터 생각했는데 이는 유럽의 뿌리 깊은 유대인 혐오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의 벨푸어 선언과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죠.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이 물러간 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 국가들이 반발하며 드디어 전쟁이 터집니다. 이것이 바로 1차 중동전쟁이자 이스라엘 독립 전쟁입니다.
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땅을 빼앗는 과정에서 불거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막기 위해서 참전했죠.
이 전쟁에서 아랍국가 중에 제일 강했던 이집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손쉽게 끝이 났는데요.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의 이스라엘이 인구 대국들인 아랍연합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낸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60%를 점령했고요.
요르단 강 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그리고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병합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권한이 강해지자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은 그들 스스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외에도 많은 무장 단체를 만들었는데요.
이들은 이후 이스라엘을 상대로 평화보다는 무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차 중동 전쟁은 1956년에 벌어지는데요.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아랍에서는 삼국 동맹 공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이 동맹군으로서 함께 이집트를 기습 공격하면서 발생했기 때문이죠.
당시 이집트가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재정이 어려워지자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친소련 노선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그 당시 수에즈 운하의 주인은 영국이었고 프랑스도 지분이 있었는데요.
그러자 원래 주인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선재 공격하며 시작한 전쟁이 2차 중동전쟁인 바로 수에즈 전쟁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1956년 말 이집트 침공을 개시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뒤이어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요.
전쟁의 목표는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을 영국과 프랑스가 회복하고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죠.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후 수일만에 이스라엘 군대는 홀로 맹렬히 진격해 시나이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단숨에 병합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미국, 소련의 냉전 초기에 벌어진 명분이 약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 나라는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개전한 이후 소련은 핵위협을 하고 미국과 유엔은 동맹군에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죠.
결국 제국주의 재림이라는 비판에 동맹군은 물러나고 이스라엘은 병합한 영토를 다시 이집트에 돌려주었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는 과정을 보면 2차 대전 후 세계 초강대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서방 세계 패권이 영국,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죠.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핵우산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핵전략 개발에 나서게 되는데요.
이스라엘이 프랑스와 핵무기를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하다가 이번에는 1967년 3차 중동 전쟁이 벌어지는데요.
이 전쟁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주변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이 연합해서 벌인 전쟁입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안정화된 적이 없었고 긴장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지 않고도 홍해로 접근할 수 있는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있었는데요.
이스라엘은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는 전쟁 명분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티란 해협 봉쇄로 인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 군대는 빠르게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죠.
그리고 해협 봉쇄로부터 촉발된 전쟁의 기운은 결국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를 기습적으로 공습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습적인 공습으로 이집트 공군이 완전히 궤멸되면서 공중 우위를 손에 넣은 이스라엘은 이후 이집트를 상대로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데요.
이어서 이스라엘을 향해 주변 아랍 국가들이 전쟁을 선포하면서 3차 중동 전쟁이 본격적으로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은 매우 싱겁게 끝났는데요.
바로 이스라엘이 이후 6일 동안 전쟁을 일방적으로 승리하면서 끝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공격해서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시리아를 공격해 골란고원을 획득했고요.
그리고 요르단과 전투를 치르는 등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병합해 버립니다.
그리고 전쟁은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이때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어마어마한 영토를 획득하는데 전쟁이 단 6일 만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3차 중동 전쟁은 6일 전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 후에 이스라엘은 높은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중동에서의 입지가 견고하게 되었는데요.
그중에 가장 큰 수확은 유대 지역과 아랍 지역으로 나눠진 예루살렘을 하나로 통일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서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서안지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난민 처리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지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 세계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졌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적은 이스라엘이 인구 대국인 아랍국가들로부터 얻은 일방적인 연속 승리의 신화는 3차 중동전쟁까지였습니다.
이집트는 3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사다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복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사다트는 먼저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면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단칼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영구진지를 돌파할 전략을 세웠고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과 전략전술을 충실히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반도 등 여러 영토를 돌려받기 위해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은 하늘과 육지, 해상에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게 바로 1973년 벌어진 4차 중동 전쟁이자 욤키푸르 전쟁입니다.
이렇게 잘 준비된 아랍 연합군의 공격으로 전쟁 발발 초기에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고전을 하게 되는데요.
아랍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 동부 지역으로 진격하고 남쪽 시나이 반도와 북쪽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의 무기지원으로 힘을 회복한 이스라엘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전쟁은 양측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인구 대국들 사이에 속국인 자신들에게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오랫동안 프랑스와 함께 개발해 놓은 몇 기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당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사용할 위기까지 몰릴 만큼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에 힘을 회복한 이스라엘군이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다마스쿠스를 다시 포위할 정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이어서 동쪽과 남쪽에서 요르단과 아랍 연합군을 격퇴한 후 마지막으로 이집트의 수에즈를 다시 포위하면서 힘을 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위기로 몰고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게 됐고 결국 유엔의 정전 결의안이 채택된 후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이 전쟁은 이집트의 전략적 승리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후 이스라엘은 캠프데이비드 약정을 맺고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다시 반환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두 나라 간 평화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당시 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서방에 압력을 넣기 위해 석유금수 조치를 취하게 되면서 1973년 석유 파동이 발생해 전 세계는 큰 경제위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중동문제는 4차례 큰 전쟁을 치를 만큼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른 이후에도 민족, 종교 간 얽힌 수많은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은 내전과 서로를 향한 무장 투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서방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아랍 사람들이 무장투쟁 단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마스 무슬림 형제단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는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서방을 향한 공격과 테러를 지금도 간간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해서 이스라엘과 서방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냉전이 끝난 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 모색을 위한 여러 번의 평화협정 시도가 있었는데요.
하지만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부의 강경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등 여러 아랍 국가들의 이해관계도 복잡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중동 문제의 해결은 지금도 매우 요원한 상태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혜사 진리의 성령,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 (0) | 2021.04.12 |
---|---|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0) | 2021.04.10 |
예수님을 구제주로만 믿지 말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으십시오. (0) | 2021.04.04 |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0) | 2021.04.03 |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0) | 2021.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