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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알아가는 삶

나인성 과부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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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 과부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

 

「내 길의 끝에서 비로소 예수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죽는 날이 예수가 사는 날이었고, 내가 파산하는 곳은 예수가 부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평안하고 무사할 때, 예수는 내 일부였고 액세서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이 내 앞에 밀려와

하루아침에 내 삶은 깨어진 난파선의 조각처럼 흩어져 버렸을 그때,

절망의 바다 위로 예수님께서 걸어오셨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

-누군가의 예수님을 향한 고백글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할 때는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내 힘으로 전혀 살 소망이 없을 때 예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차를 후진하다가, 18개월 된 아들이 자신의 차에 치여 죽게 됩니다. 

그는 아들이 집 밖으로 나왔는지 몰랐습니다. 

그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들이 죽은 뒤 죄책감과 절망감, 우울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절망의 계곡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지만 그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실한 심정으로 하나님 품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이 순간, 난생처음으로 실제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절망의 끝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힘으로 되지 않을 때,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달을 때,

아무 데도 기댈 언덕이 없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릴 때, 시한부를 선고받을 때,

직장에서 해고되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나의 끝은 끝이 아니라 그 지점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절망을 만났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

사도바울 같은 위대한 사람 즉, 신약성경을 13권을 쓴 사람.

그는 아시아와 유럽 곳곳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던 자입니다.

영적인 거장이 바로 사도 바울이지요.

위대한 사도바울이 살 소망이 끊어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고후 1:8)

 

바울은 절망에 빠집니다. 

(고후 1:9)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만난 환란은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도무지 내일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밑바닥입니다. 

위대한 영적 거장이 절망을 했다는 것이 위안이 됩니다.

내가 절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은 놀라운 반전의 말씀을 합니다. 

절망,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때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절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에게는 절망도 유익입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절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일뿐입니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 절망은 기회이고,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강력한 도구가 바로 고난과 절망입니다. 

믿는 자에게 고난과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희망의 시작입니다. 

 

 

내 실력, 내 노력, 내 재력으로도 되지 않는 나를 만납니다.

그 날이 빨리 오면 올 수록,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을 믿고 , 신뢰하고, 의뢰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나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깨어져야 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눈물 (눅 7:11-17)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기 때문에 더 신뢰가 되는 것입니다. 

(눅 7:11)

  •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어느 백부장 하인이 죽어가는데 죽어가는 하인을 살려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나인성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전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기적적인 이야기로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축제의 분위기를 안고 나인성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나인성에서 한 무리가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 무리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참 절묘하게 상반된 두 무리가 부딪힙니다. 

(눅 7:12)

  •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나인성은 '즐겁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나인성에 사는 사람들은 즐겁고 기쁜 줄 알았는데,

지금은 죽음의 슬픔이 나인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과부에게 행복을 주던 아들이 죽고만 것입니다. 

슬픔은 주변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컸습니다. 눈물이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나인성 안에서 과부만 절망에 빠져 있습니까?

아니오, 다들 남모를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마 5:4)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제야 우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부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눅 7:13)

  • 주게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주께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큐리오스'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나를 만드신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내 인생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내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시지요.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절망에 떨어진 과부에게 다가오셔서 새로운 시작을 행하십니다. 

우리의 끝은 예수님의 시작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다'의 헬라어는 창자까지 뒤틀리는 아픔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주인 되시며, 과부의 삶을 시작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평생 처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울음을 달래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절망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과부는 아직도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몰랐습니다. 

(눅 7:14)

  •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세 5경을 외웠어요.

(민 19:11)

  •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죽은 시신이 있는 관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부정해 지기 때문이지요.

시신을 만졌다면, 일주일 동안 부정한 것을 회개하며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랍비입니다. 

랍비는 더더욱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상황, 나의 어떠함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나를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청년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누가 보아도 끝난 인생입니다. 

죽은 청년이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끝이지만, 예수님은 시작입니다. 

 

 

청년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죽음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은 소망이 없는 곳에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즐겁다는 뜻을 지닌 나인성에서 나와서 무덤을 향해 가는,

절망의 끝자락에 있는 과부에게 직접 다가가셔서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절망은 예수님의 시작입니다. 

절망 끝자락에 있는 주인 되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의 관 속에 누워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죽은 청년에게 임하자, 그 청년은 죽음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세》

성경에는 나의 끝이 예수님의 시작이 되는 사건이 가득합니다. 

모세는 나이 40세에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혼자 숨어 살 때, 그의 인생은 끝이 났습니다. 

살인 사건이 모세의 모든 비전과 꿈을 깨 버렸습니다. 

 

 

광야를 지나 나이 80세가 되자 늙고 힘없는 노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이 40세에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것이라는 꿈은 허황된 꿈이었고,

모든 꿈은 모래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제 죽기만을 기다리는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잇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이 40세에 가졌던 꿈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의 나이 80세까지 기다리셨던 것일까요?

인생 끝자락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꿈이 깨어졌습니까?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자리입니다. 

 

 

《이사야》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이었던, 웃시야 왕의 친척으로

예루살렘 성안에서 왕족들과 풍족하게 지내며 살았습니다. 

웃시야 왕과 친하게 지내며 예루살렘 성전을 편하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갑자기 문둥병에 결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웃시야 왕이 죽자, 이사야는 성전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사람, 왕이 사라졌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에 떨어져,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사 6:1)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는 날, 그때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이사야는 온 유대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대 선지자가 됩니다. 

 

 

우리가 왕으로 삼은 돈, 직장, 자식, 남편, 아내,... 왕이 죽는 날이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38년 된 병자는

삶의 아무런 열정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자가 처음 베데스다 연못에 올 때는 자신의 몸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10년이 가고, 20년이 가고, 30년이 가도 자신의 병은 나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을 베데스다 연못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치유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던져주는 동전만 바라보는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병자는 절망의 끝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몰랐습니다. 

옆에 서 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너의 자리를 들고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오신 이유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38초가 되었건, 380년이 되었건, 예수님에게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지금 내 노력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그 고백을 하는 시간에 예수님은 역사하십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역사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는 질병이 치유될 확률이 거의 없을 때,

스스로 생각해도 치료가 불가능한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눅 7:15)

  •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말하자, 죽은 청년에게 생명이 들어가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살립니다. 

 

 

절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그 절망 끝에 와 계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나의 끝이 예수님의 시작입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눅7:16-17)

 

 

죽은 청년이 살아났다고 기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죄를 마음대로 짓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눅 7:11-17)의 핵심은

예수님이 절망적인 과부의 아픔을 아시고 먼저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삶의 중심은 독자인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죽자, 과부의 희망도, 인생도, 비전도 죽었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살아나자, 과부의 삶의 중심이 아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주인 된 삶을 버리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된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고난입니다. 

절망입니다. 

 

 

성공은 교만하게 만듭니다. 

성공은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타락하게 합니다. 

 

 

고난과 절망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까?

절망 속에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죄에 빠져 영원히 지옥에서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십시오.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내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내 절망, 나의 끝은 예수님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내 절망에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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