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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알아가는 삶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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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삶에 지치고 일상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고난 속에서 절망과 낙심 가운데 사는 분들 계십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다가 크게 슬픔에 빠진 한 사람을 소개하길 원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라고 할까요? 막~ 달라고 해서 그렇습니까?ㅎㅎ 막달라라는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달라라는 지역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5Km 정도에 있는 지역인데 이곳은 염색업과 직물업, 생선 절임이 유명하였습니다. 
막달라는 갈릴리를 대표하는 네 개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은 주로 갈릴리에서였습니다.

신하의 아들을 고쳤고,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고, 문둥 병자를 고치고, 중풍 병자를 고치고, 손 마른 자를 고치고, 백부장 하인을 고치고, 나인성 과부의 아이를 실리는 일들을 갈릴리에서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의식주를 돕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눅 8:2-3)

예수님의 일행 12명의 의식주를 돕는 사람들이 따라다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는 사람이 나오는데요. 또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재정이 뒷받침되는 최소한 50대에서 60대의 여성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 발에 기름을 부은 창녀로 아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얘기가 마치 사실인 양 전해지는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에서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로 등장합니다. 또 <다빈치 코드>라는 책은 마리아와 예수님을 마치 연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 곁에 따라다니는 여인들은 젊은 여성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랍비에게 젊은 여성들이 따라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입니다. 

최소한 여기에 나오는 여인들은 다 50세가 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년배입니다. 

그런데 왜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7장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 발에 기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 발에 기름 붓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기름 붓는 여인을 마리아로 일치시켜 생각한데 기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의 마리아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기름 부었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중세 시대에 어느 교황이 누가복음 7장의 마리아와  누가복음 11장의 기름 부은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로 오해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항상 마리아가 기름 부은 창녀로 나오는 것은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기름 부었다는 기록도 없고 그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과거에 일곱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 즉 하나의 귀신도 아니고 일곱 개의 여러 가지 신이 들린 사람입니다. 이는 극심한 귀신에 사로잡힌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정신, 정서, 육체...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인격은 다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런 비전도, 열정도 없이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을,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에겐 오늘이라는 태양이 떠올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테지요.
그녀에게는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여성들이 다 생각하는 아름다운 결혼은 꿈꿀 수도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귀신 들린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몸을 해하거나, 물에 뛰어 들어가거나, 불에 뛰어들어 가거나 아니면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는 자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막달라 마리아는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귀신이 나가고 온 몸이 깨끗하게 되자, 자기가 가졌던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예수님을 후원하는 일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모든 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 치유가 되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과거에는 귀신 들린 자로써 인생 자체가 어둠 속을 헤매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열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자 모든 게 달라졌죠. 생각도 달라지고, 관심도 달라지고, 말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치유된 것으로만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내용에는 다른 여성들이 함께 나오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제일 앞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기는데 제일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기적을 봤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설교를 직접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들어도 들어도 정말 좋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하면 할수록 기쁨이 넘치고 끊임없는 행복이 샘솟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이유였고, 삶의 의미였으며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죽고 3일 만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지만 그 의미를 제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바로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7:56)

  •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이런 구절들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나이가 50 - 60세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가 같이 소개되는데 제일 앞에 막달라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나이 순서대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나이가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죽으실 때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약 6시간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분이십니다.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기에 십자가에 달려도 살아나실 것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끝까지 옆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꿈을 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열정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곧 시작된다는 이유로 급히 예수님의 시신을 치우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안식일의 시작이 저녁 6시부터라면 이제 안식일이 시작되기까지는  3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3시간 동안 급히 예수님의 시신을 치워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과 아주 가까웠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있는 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많이 얘기했지만 아무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살아날 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는 군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로마 병정들을 예수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 앞에 세워 두었으며 아무도 시신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총독의 도장을 꽈~악 찍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들어가 있는 무덤 앞에는 1톤-2톤 정도 되는 큰 돌이 무덤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장정 7명-10명이 밀어야 움직일 수 있는 큰 돌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합니다. 
(눅 23:56)

  •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안식일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안식일에 가만히 쉬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주일이지요. 일찍 무덤을 향해 갑니다. 

(요 20:1)

  •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 곁에 가면 병이 낫기 때문에 몰려들었던 무리들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 제자들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명예와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소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한 자리할 수 있다는 거죠.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날은 시신이 묻히고 안식 후 첫날, 주일입니다. 

그 앞 주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칠 때 베드로와 요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타고 가시는 나귀를 끌고 가면서 우쭐했습니다. "아, 이제 진짜 한 자리하는구나. 3년 반을 따라다녔는데 드디어 마지막 한 자리하겠구나." 하며 아주 큰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왼편에 앉을 것인가
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으로 인한 큰 성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성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꿈이 다 깨져 버렸기 때문이죠. 

교회 다니는 것이 세상의 삶에 도움을 준다. 내 인격 수양에 도움을 준다. 우리 가정에 화평을 준다. 내 마음에 평안함을 준다. 내 삶에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를 믿는 분이 있습니까?
네,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병이 나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무슨 유익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예수님께 투자했습니다. 

그녀가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간들 1톤이나 되는 큰 돌을 어떻게 밀어서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 우리가 그곳에 가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대책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예수님이 계시는 무덤을 향해 갈 때, 이미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산길을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 28:2-4)

  •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로부터 와서 돌을 굴려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돌문을 열고 무덤 문을 열었습니까? 돌문이 왜 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나가시기 위해서 입니까?

요한복음을 보면 대문을 잠그고, 방문을 닫고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쓰윽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시다가 다시 쓰윽 나가셨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실 때도 돌문을 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쓰윽 나오시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오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돌문을 열었습니다. 왜 열었죠?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는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누으셨던 곳을 들어와서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 28:6)

  •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텅 빈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빈 무덤에서 급히 나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 버렸다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얘기를 듣자마자 무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요 20:2)

베드로와 요한은 급히 무덤을 향하여 갑니다. 

(요 20:3-4)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말씀에 다른 제자가 누구입니까?
요한이지요. 요한은 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40대, 요한은 20대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한이 훨씬 빨리 갑니다. 젊으니까요. 
그런데 무덤 안에 누가, 먼저 들어갑니까?

(요 20:6-8)

      베드로와 요한이 뛰어갑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들어간다고요? 성질 급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갑니다. 요한이 뒤에 들어가고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간 것처럼 세마포는 그대로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다른 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온 몸을 감쌌던 세마포가 그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두 제자는 무덤 안에서 나오고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무덤 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두 천사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 말합니다. 
      (요 20:13)

      •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우는 이유는 3일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많이 울었고, 지금 여기 와 보니 예수님의 시신조차 없어져서 더 큰 슬픔이 밀려왔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와 대화를 한 후, 뒤를 돌아보니 어떤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요 20:15)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엄청난 슬픔이 밀려옵니다. 그녀는 혹시 이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바로 곁에 와 계셨지만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습니다. 
      왜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로 곁에 와 계셨음에도 알지 못했을까요?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의 곁에 살아있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요 20:16)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곧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후,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소름이 쫙 돋겠지요. 얼굴을 꼬집어 보겠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이름을 부르실 때 예수님을 꽈악 붙잡았습니다.

      (요 20:17)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꽈악 잡으니까 "잡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않았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은 하나님께 먼저 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땅에 내려오셔서 40일 동안 계시다가 영원히 승천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쳤습니다. 
      (요 20:18)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①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섬김에도 앞장섰습니다.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녀는 새벽 미명에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주위는 불과 3일 전에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다 체포해서 죽일 기세였습니다. 
      그곳은 로마 병정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시간은 사람이 없는 캄캄한 새벽 시간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무덤에 간다는 것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맨 몸으로 1톤이 넘는 큰 돌문을 열 수도 없습니다. 
      그녀가 무덤을 향하여 뛰어간 것은 대책 없는 사랑입니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무모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계산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예수님이 죽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그때도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함께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까?
      그때도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보여준 사랑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녀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과거에 어두운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었고 신분이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분의 고하와 귀천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귀히 여기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낮은 수준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도 몰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단지 그녀는 헌신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 우주의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사랑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얘기하지 마시고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마 15:8)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말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마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 자기의 안위,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고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어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 몸과 생명까지 다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버린 분이 계십니까?
      그분을 향한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실을 이기는 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면 현실의 모든 문제를 능히 이기게 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이겨내는 당신이 되길 축원합니다. 

      ② 부활의 주님으로 현실을 이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자,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슬픈 여인이 되었습니다. 삶의 목적이 사라졌습니다. 삶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삶의 열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천사도 그녀에게 어찌하여 우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어찌하여 우느냐 물으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 생긴 슬픔은 아무도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마음에 슬픔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후, 슬픔이 생겼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인 줄 알았는데 그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믿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슬플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슬픔이 사라지고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마 28:8)

      •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말씀에 기록된 '무서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경외심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경외심과 함께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온통 어둠 속에 있다가 다시 태양이 솟아난 것만 같았습니다. 
      어둠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현실 속에서 부활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망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히 2:14-15)

      •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한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며 마귀의 종노릇 하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평생 두려움에 붙잡혀 두려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눈만 뜨면 두려워합니다. 
      돈 때문에 두려워하고 건강 때문에 두려워하고 미래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모든 두려움의 뿌리인 죽음, 사망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없애 버렸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삶에 있는 모든 두려움의 원인과 뿌리인 사망을 물리치셨습니다. 

      (고전 15:55-56)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은 죄에만 역사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들어옵니다. 
      우리의 삶에 두려움, 사망이 없으려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죄가 없다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의 뿌리인 사망을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승리의 예수가 당신 안에 있다면, 당신은 현실 속에서 날마다 승리할 것입니다. 

      (고전 15:57)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승리를 주시는' 동사는 미래 시제가 아닌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현재의 모든 문제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힘이 셉니다. 죽음은 부자를 이깁니다. 죽음은 권력자도 이깁니다. 뛰어난 능력자도, 저명한 과학자도 죽음 앞에서는 꼼짝 못 합니다. 모든 것을 휘어잡고 있는 듯한 이 죽음을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기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주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써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의 교인들 중에는 음란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교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와 같은 분파가 존재했습니다. 즉, 교회가 쪼개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 말이죠.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는 교인들끼리 민사소송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편지를 씁니다. 교인들의 문제를 세상에 들고 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늘 시비를 걸었습니다. 오늘날에 비춰본다면 당신 진짜 목사 맞아? 우리 교회 목사 맞아?라고 날마다 덤비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런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뭐냐면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부활 장, 부활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줬다는 것입니다. 

      (고전 15:57-58)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당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현실의 문제 때문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인생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한 인생을 사십시오. 그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매 순간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연약한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예수를 믿어도 무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죽자, 그냥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주의 일을 해도 죽은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로 행복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랍비여 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신 예수님, 인격이 좋으신 예수님, 내 병을 치료하시는 예수님, 내 인생에 좋은 스승님, 그런 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이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주님이시며 온 우주를 운영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순간, 예수님은 랍비가 아닌, 그녀 인생의 주님으로 모심으로서 열정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요 20:18)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믿는 종교인들이 있고, 부활하여 지금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믿는다면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도 절망하고, 낙심하고, 울고,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다면 부활하신 주님, 내 모든 것을 이끌어간, 내 인생의 주인 되신 그분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이기는 힘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 돈이 아닙니다. 현실을 이기는 힘은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될 때 현실을 이기게 됩니다.

      부활을 2,000년 전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당신이 죽은 예수를 바라보면 슬플 수밖에 없겠지만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큰 기쁨이 생깁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도와주기 원한다. 내가 너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주인 되어 아등바등하는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주인 되는 기쁨 넘치는, 열정 넘치는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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