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오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을 말합니다. 두 번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질병으로, 노환으로, 사고사로, 전쟁으로 죽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엄청난 고난이 있었습니다. 먼저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지지자들의 차디찬 배신이 있었습니다. 배신의 아픔... 정말 아프지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부르며 따르던 무리들이,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해주소서 외치던 그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위협합니다. 아마 우리가 이런 걸 경험한다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갖은 조롱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39대의 매를 맞았습니다.
매의 끝에는 쇳조각과 뼛조각이 있어서 한 번 등판에 채찍이 가해질 때마다 살점들이 떨어져 나가고 등판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건장한 남자라도 기절하고 죽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써졌습니다.
이는 한국에 있는 가시나무의 가시가 아닙니다. 팔레스틴 땅은 물이 없는 곳으로 그 가시는 굉장히 강합니다.
그곳의 가시는 여행객들의 신발을 뚫어 버릴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7-10cm 정도 자라는 아주 강한 가시로 예수님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아마 가시 면류관을 씌우자마자,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찌르는 고통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로 약 60Kg 정도 되는 나무 십자가를 지고 평지가 아닌 오르막길 800m를 계속 올라갔습니다. 너무나도 멀고 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무 십자가를 질 말한 힘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힘이 없어서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바위에 부딪치고 돌에 부딪히면서 얼굴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로마 병정들은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이르자,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 위에 눕혀졌습니다.
그리고 약 20cm 정도 되는 못이 양손과 양발에 박혔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 중에 가운데에 매달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팔레스타인 땅의 사막기후, 뜨거운 열과 목마름 속에 호흡곤란으로 서서히 생명을 잃어 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욕설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심장이 터져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었는데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육체적 고통도 아픈 고통이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욕설을 받는 것도 아픈 고통이지만 하나님이 외면하는 고통은 정말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처럼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으로 혹독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 조롱과 멸시 천대 어이해 받았는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어찌해 가셨는가.
십자가 사건은 단지 무섭다, 고통당하는 예수님 참 아프셨겠다는 느낌으로 절대 끝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경은 예수님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핍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의 피지 않느냐, 그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냐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자궁만 빌렸을 뿐, 마리아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엄마의 피는 태아의 피에 영양분은 공급 하지만 피를 물려 주지는 않습니다.
엄마와 아기의 혈액형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잖아요.
만약, 엄마의 피와 태아의 피가 섞인다면 태아는 즉사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리아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핍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어린 양과 같이,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해 하나님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을 왜 양을 키웠을까요? 양고기를 좋아해서 양을 키운 게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양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꼭 제사를 지내며 자신들이 지은 죄를 사했습니다.
어린 양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세푸스(유대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유월절 날, 죽은 어린 양의 숫자가 20만 마리 정도 된다고 하였습니
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어린 양을 죽여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날,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은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예언하였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의 피는 1년 동안 지은 죄를 일시적으로 해결해 주는 짐승의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영원히 해결해 주는 하나님의 피입니다.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짐승의 피는 완전히 죄를 없애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없애줍니다.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제사였어요. 한 번의 제사였지만 그것이 영원한 제사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이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AD 315년에 십자가형을 없애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 십자가형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십자가형을 직접 본 사람은 트라우마로 고통받았기에 십자가형을 없애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고 또 틈만 나면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①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을 나타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을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그냥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죄는 마음대로 지어도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절대 관대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또한 작은 죄라도 죄를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죄는 죄입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결국은 우리를 죽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실수했다, 또는 자기의 약점이라고 하며 죄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죄는 약점이나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죽게 만드는 무서운 것입니다.
구약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를 보면 죄를 지을 때 인간을 대신해서 짐승을 잡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새를 죽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양을 죽이고 돈이 있는 사람은 황소를 죽였습니다.
새를 죽일 때는 목을 비틀었습니다. 소나 양을 죽일 때는 가죽을 벗겨 각을 뜨고 배를 찢었으며 내장들을 다 꺼내어 불태웠습니다.
짐승을 죽이는데 왜 목을 비틀고 각을 떴으며 내장을 다 끄집어내어 불태웠을까요? 왜 이렇게 잔인하게 죽여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의 목을 비틀고 내장을 다 끄집어내어 불태우시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만큼 죄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에 대하여 관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단 한 점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판하시길 원하십니다.
(레 1:5-9)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1:15)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기록된 끔찍한 제사의 모습을 신약에서 예수님께 적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만큼 죄를 심각하게 처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죗값이 얼마나 처참한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혹독한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입니다.
내가 별 것 아니라고 짓는 그 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토록 고통스러운 죽음의 길을 가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안다면, 고집스러운 범죄를 단호하게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정말 안다면, 불순종과 교만, 음란, 거짓말, 시기심, 질투, 수군거림과 같은 이 모든 죄를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고통을 정말 안다면, 아주 작은 죄에 대해서도 혐오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죄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희생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이 당하신 고통을 기억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죗값을 치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비참하게 죽일 수 있냐며 빈정 거리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죄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시기를 요구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절대로 적당히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지금 혹시 죄를 짓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전히 똑같은 죄를 되풀이하여 짓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것이 기억난다면 얼렁뚱땅 넘어가지 마시고 진실하게 사과하십시오.
기회는 늘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도 죄를 짓고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으면 됐지."라고 생각한다면, 아닙니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반드시 상대방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범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모두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다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든지 죄의 심각성을 알고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당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②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로마 병정입니까? 그 당시의 제사장들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입니까? 빌라도예요?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쇳조각과 쇠뭉치가 달린 채찍에 맞게 하고 손과 발에 대못을 박게 하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6시간의 고통 속에 죽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상함을 받기를 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고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당하는 고통을 다 아십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제자들의 차디찬 배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욕설, 십자가의 고통과 같은 처절한 죽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통당할 때,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폭도들이 자기 아들을 때리고 침 뱉고 채찍질하는 것을 다 보셨습니다.
아들의 몸을 휘감은 가죽 채찍이 예수님의 살점을 뜯어 내고 피가 흐를 때마다, 그 채찍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휘감은 고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입김으로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을 산산이 흩어 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인적인 무리를 향하여 천둥과 붕괴로 순식간에 다 죽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무지한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마를 찌르는 가시 바늘 하나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이마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난폭한 로마 군인들이 아들의 손과 발에 못 박을 때 , 하나님의 손과 발에도 못이 박히는 고통이 전해졌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하나님은 심장을 찔리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칠 때, 인간의 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헐떡일 때, 인간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이 헐떡이는 고통을 보지 않으셨을까요?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는 바로 당신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정말 일어난 일이고 예수님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는 한 사람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13: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기가 좋은 행위를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다시 잠겨야 합니다.
큰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인생을 살리고 내 미래를 살리고 내 모든 것을 살려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초라한 사랑을 구걸하지 마시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비를 흠뻑 맞은 사람은 세상의 조그만 일에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우울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랑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초라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잠겨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행복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나는 초라하지만 하나님은 내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할 만큼 나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얼마만큼? 예수님을 죽게 할 만큼!
예수님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다 주의 계수로부터 나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가치는 인간의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비록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시니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죄를 짓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핏값으로 살려 주셨으니 우리의 가치는 무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가치라는 것은 비용을 얼마나 들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바 되었기에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습니까?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였습니까?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떠났습니까?
절대로 열등감에 빠지거나 자학하거나 우울에 빠지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죽여서까지 살려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이 세상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어느 중년 남자가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 시기에 나라 전체가 큰 공황에 빠졌고 남자의 사업도 엄청난 부도에 넘어갔습니다.
가진 재산을 다 잃어 비리고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삶을 포기하려고 강가로 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지만 너무 큰 빚을 졌기에 그냥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중년 남자가 다리 난간을 바라보며 강물로 뛰어들려고 할 때, 귀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생님, 연필 한 자루 사 주세요."
자살하려던 중년 남자는 연필을 받지 않고 호주머니에 있던 1달러를 주고 다시 난간으로 갔습니다.
그때 연필을 팔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선생님, 돈을 주셨으면 연필을 받으셔야지요."
"나는 연필은 필요 없소."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연필을 팔던 사람이 말합니다. "연필을 받지 않으려면 다시 1달러를 가져가세요."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연필 파는 사람을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연필 파는 사람은 두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와 여유가 있었습니다.
중년 남자가 연필 파는 남자를 보고 놀라자, 그 연필 파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나의 희망입니다. 나는 다리가 없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내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셨어요."
자살하려던 중년 남자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연필을 받아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고, 재기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미국 경제 대공황을 이겨내고 성공한 강철왕 카네기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 가슴에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되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런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랑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죄 없이 살았어요, 예수님이 얼마나 순종하며 살았어요, 예수님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늘 넘어지고, 늘 죄를 범하고 회개하고, 또 죄를 범하고 회개하고, 또 죄를 범하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겠니.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내 아들 예수를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였단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 듯이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사랑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방황을 끝내고 사랑의 부모인 하나님을 향하여 가시기 바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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