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존중!
존중의 축복이라는 소재로 말씀 나누길 원합니다.
어느 마을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없는 그의 아내는 남편을 놀리느라 '절름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절름발이의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철이 든 아내는 남편을 '박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박사 부인'이라고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존중할 때 나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탈권위주의 시대 혹은 자기만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존중'과는 먼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비방하기를 좋아하고 부모를 거역한다고 말씀합니다.
(딤후 3:1-2)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오늘날은 부모를 존중하기보다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스승을 존중하기보다 비난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습니다. 참 서글픈 일입니다.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도 나중에 자신이 부모가 됐을 때는 자녀들에게 존중받기를 원하죠. 아이러니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하여 양육하는데 자녀들이 부모를 원망하고 비난하면 허무하겠죠.
모든 사람은 존중과 존경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 주위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내가 존중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존중해야 하는 거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존중이라는 헬라어는 티미(τίμι)로 이 말의 뜻은 중요하게 여긴다. 귀중히 여긴다. 진가를 인정하다는 말입니다.
존중의 반대 말은 헬라어로 아티미아, 멸시하다. 무시하다. 천하게 취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부모를 존경한다는 것은 부모라는 권리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스승을 존경한다는 것은 스승의 권위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죠.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존중의 중요성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가는 곳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유독 한 장소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죠.
(막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던 곳은 바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동네입니다.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왜 나사렛 동네에서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을까요?
(막 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존경을 받았지만 유독 나사렛 동네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거예요. 존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존경받지 않으면 기적을 행할 수 없습니다. 존경받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고 싶지 않음을 뜻하죠.
성경에서 존중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꽃과 산, 바다를 만드신 후 제일 마지막에 하나님의 걸작품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동물에겐 없는 하나님의 생기까지 불어넣으셨죠.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거죠.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인 사람을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면서 존중의 중요성을 나누고자 합니다.
엘리야 :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엘리사 :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다
엘리사는 아합왕 시대에 요단강 아벨 므홀라(Abel-Meholah)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아버지는 사밧이라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아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에는 소가 24마리나 있었는데요.
엘리사의 집안은 밭을 일구는데만 24마리의 소가 필요할 만큼 큰 대지를 소유했습니다.
대단한 부자였죠. 시쳇말로 고급 승용차가 24대가 있는 집안이라는 겁니다.
부잣집 아들 엘리사에게 그 시대에 최고 유명한 엘리야가 나타나서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되라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가 소유한 부요함을 다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이미 엘리야 주변에는 엘리야를 따르는 50여 명의 생도들이 있었는데요. 그들 무리에 엘리사도 합류하여 엘리야를 따르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엘리야를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엘리사의 삶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상 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곳이죠.
물 한 바가지를 구하려면 아주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합니다. 엄청난 수고가 필요하죠.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었다는 것은 엘리사가 몸종으로써 철저한 헌신과 순종으로 엘리야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따르는 엘리사를 떼어놓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데요.
하지만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장소를 옮기면서까지 자신으로부터 엘리사를 떼어 내려합니다.
엘리사는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왕하 2:1-2)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엘리야와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갑니다. 12Km입니다.
(왕하 2:4)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엘리야와 엘리사는 벧엘에서 여리고까지 갑니다. 20Km입니다.
(왕하 2:7)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엘리야와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요단 강가로 갑니다. 4Km입니다.
즉,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 강까지 직선거리로 약 36Km입니다.
기록된 땅은 평지가 아닙니다. 울퉁불퉁한 길이며 높고 낮은 언덕길입니다. 하룻길이 아닙니다. 며칠 걸렸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세 곳을 다니면서 엘리사를 떼어 내려고 하였으나 엘리사는 결코 엘리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곁에 있던 50명의 생도는 그의 곁을 떠났지요.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 곁에 남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단순히 스승으로만 섬기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를 영적 아비로 모시고 존경하였던 겁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목 놓아 부르며 펑펑 웁니다.
유대인들이 옷을 찢는다는 것은 극심한 슬픔을 표현하는 겁니다.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엘리사는 엘리야를 단순한 스승이 아닌 아버지로 존경했습니다.
펑펑 눈물을 쏟고 옷을 찢으며 존경을 표현한 거죠.
존경은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하는 것입니다.
떠나버린 50명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성을 물려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엘리사만이 엘리야가 가졌던 영성을 스승이 가졌던 것의 갑절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존중에는 분명한 축복이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며 사십시오.
존중은 당신의 인생을 형통하고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누구를 먼저 존중해야 합니까, 존경해야 합니까?
① 부모를 존중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 부모를 만납니다. 부모를 양육자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모를 영적 아비로 모시기 바랍니다.
(엡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공경하라는 것은 존중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를 존중하라는 것은 제안이나 부탁이 아니에요. 명령입니다.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세대는 부모를 존중하지 않아요. 공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공격하죠. 무시합니다. 함부로 대하죠.
(신 27: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부모를 우습게 보고 무시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겁니다. 어떤 저주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의 저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고 돈이 있고 지위가 있어도 그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노아의 실수와 그의 세 아들
창세기 9장.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포도주를 먹고 취한 장면이 나오죠.
노아의 세 아들 중에 함이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죠.
왜요? 함이 그의 아버지의 실수를 떠들고 다녔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존중했기 때문에 큰 이불을 들고 뒤로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 주었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였습니다.
(창 9:26-27)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성경은 함을 가나안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후에 끔찍한 저주를 받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저주를 받냐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명하시죠.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죽이라 명령하셨을까요?
가나안 땅 사람들은 함의 후손이기 때문이죠. 아버지를 향한 존중이 없는 사람들, 아버지를 거역하는 사람들, 반항하는 사람들을 다 죽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은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존중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반항과 불순종과 거역의 죄를 짓는 겁니다.
혹시 부모를 존중하지 않거나 거역하고 부모의 말씀을 듣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시고 다시 부모를 존중하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에 밀려오는 저주를 막아주고 인생을 형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노아의 실수는 세 아들에게 아버지를 향한 존중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일종의 테스트죠.
평소에는 다 아버지를 존중해요.
그러나 진짜 존중은 부모가 실수했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상하게 노아의 실수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고 세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각각 저주와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부모의 실수를 따지지 말고 부모를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존중'에 대한 태도를 테스트하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존중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순종을 배우십시오.
부모의 말에 경청하는 것이 존중의 시작이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존중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② 스승을 존중하십시오.
사람이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부모도 중요하지만 좋은 스승도 아주 중요합니다.
다윗
다윗은 아버지 이새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와서 당신의 아들 중에 왕이 난다고 얘기하니, 다른 아들들은 다 지나가게 하지만 막내 다윗은 부르지 않아요. 왜요? 아버지 눈에 다윗은 큰 인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죠.
심지어 아버지 이새는 다윗의 이름도 모릅니다.
일곱 명이 다 지나고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냐고 물으니 없다고 대답합니다. 진짜 없냐고 재차 묻자 그제야 막내가 있다고 얘기하죠. 다윗은 이름 없이 그저 막내로 불렸어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다윗은 사무엘을 자신의 영적 아비로 모시고 어려울 때마다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영적 스승을 모시고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스더
에스더는 자기의 양부모 모르드개를 영적인 아비로 모시고 살아서 유대를 살리는 왕비가 되죠.
요시야
요시야는 일찍 부모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덟 살 때 왕이 됩니다.
요시야는 실기한 제사장을 영적 아비로 모시고 유대 땅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다 없애고 모세 이후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선왕이 되었습니다.
누가
신약에 나오는 누가는 바울을 자신의 영적 아비로 삼고 바울의 주치의를 자청하여 바울을 좇아 다니면서 바울의 모든 것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되죠.
마가
어린 마가는 삼촌인 바나바를 영적인 아비로 삼고 나중에 베드로를 만나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디모데
어린 디모데는 바울을 영적인 아비로 삼고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초대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가 됩니다.
엘리사
엘리사는 엘리야를 영적 아비로 모시고 엘리야가 천국 가는 날까지 섬기고 돌보고 존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성의 배를 물려받았습니다.
스승의 영성을 배로 물려받는다는 건 큰 축복이죠.
인생에는 수많은 스승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게 하지 마시고 전심으로 존경하여 스승의 은사를 배로 물려받는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나이 40세에 나이 82세 되는 모세를 찾아가서 모세를 영적 아비로 모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부른 게 아니에요. 여호수아가 모세를 찾아간 거예요. 그는 자발적으로 모세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무려 40년 동안 변함없이 모세 곁을 지키며 모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모세를 존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모세의 모든 영성을 다 물려받았습니다.
정작 모세의 아들들은 모세의 영성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아들이라 하여 아버지의 것을 다 물려받는 게 아닙니다.
아들이라도 아버지를 존중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은사와 영성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도 그분을 내 영적 아비로 모시고 존중한다면 그분이 가지고 있는 영성을 배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을 40년 하게 되죠.
모세 주위에 있는 자들이 모세를 공격하였습니다. 비난과 원망, 공격 그러나 여호수아는 단 한 번도 모세를 향한 존중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의 위대함입니다.
혼자, 스스로 성숙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스승에 대한 욕심이 있기 바랍니다. 영적인 스승을 만나는데 욕심을 내십시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입니다.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은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스승을 존중하지 못해서 바람처럼 지나가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존중하여 스승이 가진 능력을 다 물려받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사무엘
나쁜 권위자 밑에서 강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영성이 없는 엘리 제사장 집에 가서 몸종처럼 엘리 제사장을 섬깁니다.
엘리 제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과 술 취한 것을 구별하지도 못하는데요.
영성이라고는 1도 없는 엘리 제사장 밑에서 사무엘은 예배를 배웁니다. 제사를 배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웁니다.
사무엘은 단 한 번도 엘리 제사장을 향해 원망하거나 공격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물려받아야 할 모든 영성을 몸종 사무엘이 다 물려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존중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마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0-42) 예수님께서 존중해야 할 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 선지자를 존중하라
영적 지도자를 환대하고 존중하라.
영접한다는 것은 환대한다는 거예요.
손님을 모셨을 때 맛난 음식을 준비하고 선물도 마련해 놓음으로써 그분을 향한 존중을 표현하는 거죠.
이것을 환대라고 합니다. hospitality. 환대는 사람의 마음을 오픈시켜 줍니다.
선지자를 환대하면 그 선지자가 받아야 할 상을 우리가 다 받게 된다는 거예요.
② 의인을 존중하라
내 주위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존중하라
③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존중은 위로, 옆으로, 아래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환대하라, 존중하라, 영접하라 그리하면 상이 있을 것이다.
부모, 자녀, 선생님, 학생, 직장 상사, 부하 직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에는 언제나 위, 옆, 아래 상관없이 존중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로부터 존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존중을 받지 않고 자란 아이보다 훨씬 나은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존중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모든 사람은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존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변명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하십시오.
상대를 귀하게 여길 때 모든 관계는 축복이 됩니다.
존경하는 자가 많게 되길 바랍니다.
말세의 질병인 비난과 불평과 원망을 버리고 존경과 감사로 축복을 누리는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존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인생의 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존경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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