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 병자 예화
(눅 5:16-17)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이지만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믿습니다.
반면, 사두개인들도 똑같은 율법주의자이지만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지요.
율법 교사들은 구약의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인데요. 다시 말해서, '율법의 선생'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바리새인 율법 교사, 유대에서 온 바리새인 율법 교사,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율법 교사... 다 따로 떨어져서 멀리 있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한패가 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논쟁하기 바쁜 그들이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데는 한패가 된 것입니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오면,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기름 부음(축복, 보호,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라는 뜻)이 오는 것입니다.
호시탐탐 예수님을 책 잡으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 있고 동시에 병을 고치시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이 원수가 있으면 더욱 강해지죠.
물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예수님께 없을 리 없지만, (특별히 원수가 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할 때) 그 원수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서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치료하는 근원이 되십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도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병을 고치시는 주의 능력이 이 자리에 임하여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당신의 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지금 이곳에 임하는 이유는 오로지 당신을 고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눅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중풍은 뇌졸증으로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어려운 병입니다.
하물며, 옛날에는 불치병으로 여겨졌겠지요. 극심한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는 병을 고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집에만 누워 있을 수 없었겠죠.
하인을 부르든지, 동료들을 불러 자신이 누운 침상을 가마처럼 둘러메고 예수님께로 왔을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뭐, 예수가 무슨 수로 병을 고칠 수 있겠어?" 코웃음 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 병자는 스스로는 거동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침상에 누운 채, 들 것처럼 들려서 예수님께 오기까지...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순조롭게 데려다 놓을 줄 알았지만, 예수님 앞에 쉽게 나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쉽게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눅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갔지만 이미 군중이 문간까지 꽉 들어차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비집고 들어가려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뚫고 지나갈 수 없으니, 오직 공중에서 내려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중풍 병자를 옮기는 무리는 마침내 이 집의 지붕에 올라가서 남의 집 지붕을 헐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을 지을 때 회벽 돌로 넓적하게 집을 짓습니다.
그곳에 망치로 두들겨 구멍을 내고 그 큰 침상을 달아 내릴 정도라면 집 한 채가 다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집을 때려 부수고 있는데 정작 집주인이 고함쳤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어요. 희한하지요.
왜 고함치지 않았을까요? 이미 중풍 병자가 집주인에게 돈을 많이 줬겠지요.
(눅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아무리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정말 믿음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악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고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본다고 말씀하십니다.
침상째로 들려와서 집값을 지불하고, 천장을 뚫어 위험을 무릅쓰고 매달려 내려오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오면 반드시 낫는다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행위로 보인 것입니다.
(눅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왜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그 후에 인류에게 병이 왔습니다.
근원적으로 병은 죄입니다.
반드시 내 죄로 인해 내가 병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로 인해 병이 드는 것입니다.
병의 뿌리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내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를 씻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는 언제나 치료에 앞서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치료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가장 먼저 "중풍 병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체는 병이 나아도, 병이 없어도 결국에는 죽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바라면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영원한 것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사람 속에 속(영혼)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 질투, 거짓말,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마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 폭력, 미움...
이런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모두 죄입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천국과 지옥으로 정해지는 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죄 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를 흘려서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눅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시 139: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 머리털까지 세시고 내 내장을 지으신 주권자 외에 누가 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십니다.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가 누구요,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은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보기에 시골뜨기인 예수님이 전혀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거든.
감히 하나님처럼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행동하는 게 꼴 보기 싫은 거지.
그러자 예수님께서 22절에 대답하십니다.
(눅 5: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통해서 이미 사람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시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예수님께서 23절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께서 큰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고 말을 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네가 뭔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느냐, 이건 신성모독이다."라고 받아치죠.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 그러면 좋다, 너희가 보기에 침상에 들려서 내려오는 중풍 병자를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겠느냐, 네가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이 쉽겠느냐."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것은 결과가 증명이 안 돼도 좋으니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죄를 사함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알 거야.
그러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즉각 나아서 결과가 눈에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쉬울까요?
당연히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쉽죠. 죄 사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중풍 병자에게 침상을 들고 돌아가라고 했는데 못 돌아가면 거짓말이 들통나잖아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중풍병자가 어떻게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조건을 내거신 것입니다.
"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이 중풍병자를 고쳐서 지금 당장 침상을 들고 돌아가는 것으로 증명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주 공평한 제안이지요.
"내가 하나님으로서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면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서 내보내겠지만,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병자가 죄 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중풍 병자가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가면 그 사람이 죄 사람을 받고 나는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
모인 무리는 긴장하고 지켜봅니다.
"과연 저 사람이 나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며, 낫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참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은 참람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십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일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대한 문제입니다.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지 말씀만 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빛이 있으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궁창이 생겨나라 말씀하시니 하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위대한 창조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데 중풍 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가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눅 5: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로 길이 막혀서 나아갈 수 없었지요.
하지만 병이 낫고 나니, 막혀있던 길이 확 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길이 다 막혔지만 은혜받고 나니 길이 확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전에는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 은혜받고 나니 모든 사람이 길을 비키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받고 나면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도개인, 율법 교사들, 서기관들이 할 말이 없습니다.
"네가 감히 하나님 밖에 죄를 사하지 못하는데 네가 뭔데 죄를 용서한다고 하느냐, 돌로 쳐 죽여야지."
그런데 주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쉽겠느냐, 네 침상을 들고 가라는 말이 쉽겠느냐.
그들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쉽다고 말합니다. 중풍 병자가 침상을 들고 걸어갈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내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명하겠다.
이 사람아, 침상을 들고일어나 걸어가라, 즉시로 일어나서 걸어가 버리니까 할 말이 없죠.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손뼉을 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죄도 사하시고 병도 고치십니다.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고 그런 다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놀라고 영광을 돌리고 그다음에는 두려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의인은 두렵지 않지만, 죄인은 두렵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심히 두려워하기로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그 결과로 과연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구나,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구나, 그는 죄도 용서하고, 병도 고치고 좋은 일만 하신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눅 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레위는 마태라는 사람입니다.
마태라는 이름을 레위라고도 하고, 마태라고도 합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굉장히 미워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하고 재물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착취한 재물은 로마 정부에 바치고 자신의 주머니에도 넣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리를 가장 큰 죄인으로 꼽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리를 원한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리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은 세상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십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속 사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눅 5: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돈이나 지위, 명예나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버리기가 싫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배와 그물을 던져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레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너무 좋아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요.
세리들이 모여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관일 것입니다.
"야~ 로마의 주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 저런 흉악한 죄인들만 모여있으니, 예수가 죄인의 수괴가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비웃었던 것입니다.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또, 제자들에게 너희가 선생이라고 칭하는 예수가 어찌 부정하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느냐며 비난했습니다.
(눅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회개하고 자복하여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교회가 천사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천사도 오고, 죄인도 오는 곳입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죄인들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인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사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시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온다면 주님께서는 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예수께 나올 수 있고, 병든 자도 예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서 자유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위대한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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